공기페이지 Air Pages
(결국 각자의 공기페이지를 한 아름 안고 사그라들, 표류하고 방랑하고 유영하는 존재들을 떠올리며)
매일 아침 커튼을 열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커튼을 닫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언젠가부터 매일 커튼을 열고 닫는 반복되는 손의 동작이 새삼스레 중첩된 시간 감각으로 자각되면서 일력을 한 장씩 뜯어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공기페이지를 넘기며 하루의 무대를 열고 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의 페이지를 다시 오전 오후로, 시간 단위로, 분으로, 초로, 밀리초, 나노초… 이렇게 나누어 생각하다 보면 얇디얇은 시간의 페이지들이 무게도 느낄 수 없이 폭포수처럼 가볍게 쏟아져 내려서 나를 스치고 지나가버린다. 그런 생각만으로 멀미가 나고 발바닥이 간지러워진다. 하루의 출현과 반복으로 펼쳐지고 사그러드는 시간들을 감각하며, 회화로 특정 시간들을 뭉쳐낼 수 있는 오묘한 지점을 탐구하고 있다.
미술사를 뒤적이며 고대 미술에서부터 지금까지 반복되어 느껴지는 원형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탐색하고 있고 요즘은 특히 17세기 풍경화, 정물화, 수렵화 등에서 지금의 현실 세계에서 보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지는 부분들, 19세기 회화의 볼드한 색감과 투박한 붓터치들, 큐비즘 회화들에서 느껴지는 분절된 리듬감에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다.
최근 작업에서는 일상에서 축적되어 체화된 특정 시간대들을 덩어리로 떠올리고 소리, 리듬, 빛의 흐름, 촉감, 미각, 후각 등 다양한 신체 감각들에 대한 기억을 회화 언어로 재구성해 색을 투과시킨 공간으로 연출하고 있다. 작업환경이 의식주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집과 주변 환경에 서식하는 동물, 새와 곤충들을 매일 관찰하고 그들의 생태계와 움직임에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 생존과 본능으로 움직이는 생물체들의 동작이 미적 행위나 창작의 행위로 읽히기도 한다. 작업실 메이트가 만들어내는 음악 작업 도중의 분절되고 조각난 소리가 반복적으로 떠다니고, 회화작업이 미완성 상태로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작업실 환경에서 패치워크 조각들이 떠다니는 인상을 자주 받는다. 그런 분절된 시간의 조각이자 창작의 조각들을 큐비즘의 방식으로 퀼팅 하듯 유화 작업을 하곤 한다.
이번 Air Pages 전시는 초여름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시간들을 계속 떠올리며 작업했다. 공기페이지가 나풀거리는 진공의 사색적인 공간을 연출하고 싶어서 이전 작업보다 주인공 역할을 하는 생물체들의 비중을 많이 줄였다. 하루라는 시간 자체를 미스터리한 창작의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생성과 소멸의 무대로 바라보고 시간의 주름 사이에 투과·투영되는 기억과 감각을 회화로 재구성하려고 했다. 빈 캔버스 앞에서 색면을 충동적으로 배치한 다음 하늘과 대지 혹은 천장과 바닥이 혼합된 장소를 만들어 들어간다. 커튼, 베개, 테이블, 침대와 같이 일상에서 매일 반복되어 사용되는 사물들을 캔버스 안에 기본적인 요소들로 배치하고, 그 위에 미술사 속에서 마음에 와닿는 부분들을 차용하거나, 식물과 동물, 곤충들을 배치하여 구조적으로 가상 서사가 있을 것 같은 화면을 연출하고 있다. 곳곳에 망상적이고 농담적인 드로잉을 배치하고 화면의 구조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주조색과 밸런스를 의식하며 마무리의 단계까지 끌고 나간다. 완벽한 표면보다는 조금 흐트러지거나 미완의 표면을 곳곳에 배치하려 하고 느슨하고 경쾌한 화면을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