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uity Buttercream>

  

과일향 버터크림의 맛 (The Taste of Fruity Buttercream)

 

그림을 보다 입안의 혀가 달싹거린다. 향긋하지만 어딘가 얄궂은 향,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부피감 위에 거짓말처럼 생생하게 내려앉은 색, ‘쿡’ 하고 건드려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최수진의 그림은 말 그대로 색색깔의 ‘과일향 버터크림’을 듬뿍 짜놓은 것 같다. 작가는 오랜만에 선보이는 일련의 신작에 거대한 사색의 언어를 덧붙이기보다 장난스럽지만, 지극히 솔직한 감각을 드러내는 단어들로 이 새로운 챕터의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삼성동 AIT 본관 2층과 별관 1층에서 2021년 11월 5일부터 11월 27일까지 열리는 <Fruity Buttercream>은 최수진이 약 3년여만에 선보이는 개인전으로 평면 회화와 털실 드로잉 그리고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사운드가 어우러지는 공감각적 설치를 선보인다.    

 

최수진의 화면은 언뜻 달콤한 꿈속의 장면들만 모아 놓은 듯하다. 하지만 사실 각각의 풍경들은 섬세한 규칙과 그만의 이야기로 세밀하게 쌓아 올려진 세상을 표현한다. 작가는 마치 자신의 그림으로 실제 하는 또 다른 비밀 공간을 만들고 있다는 듯 차곡차곡 그 세계를 위한 물질들을 그림 속에 미리 준비 시켜 두고 있다. 이건 ‘수박은 수박 크기로 사람은 사람 키만큼’만 그리게 된다는 작가의 푸념 섞인 말의 이유가 될 것이다. 현실과 거리감 없는 사물과 인물의 크기 만큼 그가 그리는 세계를 향한 작가의 상상과 마음의 크기는 서로 맞닿아 있는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소소하게 느낀 것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절대 자신의 감정을 비약하지 않는 담담한 문장을 볼 때 우리는 그 글이 참 좋다고 느낀다. 그런 시나 소설 또는 당신의 마음을 움직인 누군가의 편지처럼 최수진의 작업은 일목요연한 논리나 화려한 묘사 없이도 심지어, 이야기 속 빈 여백은 알아서 채워가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게 만드는 이상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런 지점이 그의 작업이 일찍이 주목받으며 많은 이들이 작가의 새로운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일 것이다.  

 

위대한 마스터들 

이제, 작가는 이런 그림 요소들을 더 잘 다루게 되었다. 그건 줄곧 작가의 뒤에서 보이지 않게 움직였던 *F-CREW들의 도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들은 아직 작가의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그들은 하얀 캔버스 위에 뚝 떨어진 점, 선, 면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어떤 색도 두려울 것이 없다. 단지 매일 맡겨진 책임을 묵묵히 헤쳐가는 숙련된 일꾼들처럼 파랑, 노랑 그리고 *빨강을 건져 올리며 한 점의 의심 없이 능숙하게 색과 형태를 직조해나간다. 만약 그림의 세계에 히어로물이 있다면 그것은 이들을 두고 쓴 이야기일 것이다. 색과 덩어리, 표면의 구성과 화면의 비율 따위를 자유자재로 조합하는 이 위대한 마스터들은 방금 거대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작가와 그들만 아는 깊은 협곡에 잠시 머물고 있다. 

 

다양한 예술의 매체들 가운데서도 그림은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뚫고 지나야 끝이 나는 일이다. 작가 역시 자기만의 시간을 통해 작품을 일궈가지만, 한편으론 이 알다가도 모를 일에 대해 편히 고민을 토로하며 적당히 기댈 수 있는 그런 존재를 꿈꿀 것이다. 이와 같은 이들은 그림 속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독히 나르시시즘적이라 겉으로 표현하진 못할지라도 나와 내 주위를 감싸 안는 그런 존재들을 누구든 한 번쯤은 꿈꿔 볼 것이다. 이렇게 모두가 생각하지만 꺼내놓지 못하는 순수한 상상들을 최수진은 자신만의 언어로 거침없이, 기분 좋을 만큼의 가벼움으로 또 누구보다 감각적으로 말한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작가가 지닌 독특한 힘이다. 

 

떨어지는 문자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만의 시각적 언어가 가진 힘을 조금 더 믿어보기로 한 것 같다. 어딘가에서 후드둑 떨어져 내린 것 같은 문자들과 F로 시작되는 수많은 단어를 작가는 자기만의 방식대로 써 내려갔다. F로 시작되는 낱말들은 여전히 현실과 캔버스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진 못하지만, 오히려 이는 작가가 그것들을 스스로의 것으로 다시 곱씹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된다. 단단하기만 했던 이 단어들은 작가의 차원을 거쳐 말랑말랑하며 울퉁불퉁한 빈칸을 가진 *크로스워드가 되었다. 이것은 실제 별관 1층 전시장에 울려 퍼지는 사운드와 결합해 단어와 단어 사이에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 낸다. 전시장에 안에 사운드는 징검다리 같이 생긴 이 낱말들 위를 한 발자국씩 내디디면 생겨날 것만 같은 소리의 조합처럼 들린다. 

 

빈칸으로 남겨진 글자들, 하지만 서로 연결된 이 한 뭉치의 형태 자체가 어쩌면 작가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언어의 모양일지 모른다. 이 문장의 일부는 허공에 나른하게 매달린 거미가 하염없이 실을 뽑아내듯 즉물적으로 만들어낸 털실 드로잉들과 함께 보여진다. 그저 손이 가는 데로 짜보았다는 작가의 털실 드로잉은 물감으로 그려낸 그의 그림과 많이 닮아있다. 이렇게 최수진은 다락 한 켠에 쌓아둔 털실들의 감촉과 튜브 물감 안에 색색의 질감들을 감각하며 그가 상상하는 흥미진진한 세계를 계속해서 담아낸다. 그리고 우리는 과일 버터크림 같은 이 그림의 표면 위에 얼굴을 푹 처박고 되도록 완벽히 이 세계에 빠져 지내면 된다.

 

 

 

 

 

 

 

*표기는 전시 작품의 제목에서 발췌.

<빨강 건져올리기>, (2021),

<F-Crosswords>, (2021)

<F-Crew>, (2021)

<털실드로잉24p>,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