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독백들 Floating Monologues
정현 (미술비평)
장마철의 습한 공기는 일상적인 습관을 파괴한다.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나고 옷에선 설명하기 힘든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장마 기간 동안의 삶은 몸과 공기가 꽤나 가깝게 밀착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물의 반란은 사정없이 일상을 뒤흔들어놓으면서 물의 권능을 세상에 알려준다. 부족함과 넘침은 늘 갈등의 출발점이 된다. 유난히 긴 장마 기간 중에 나는 젊은 화가 최수진을 만났다. 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림으로부터 물의 느낌을 받은 이유가 말이다. 그림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숲의 습한 공기였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숲의 질감은 아무렇게나 솟아나있는 나뭇잎과잡초로 더 강하게 부각된다. 비교적 가벼운 붓 터치로 마치 낙서를 하듯 무신경하게 그은 선들은 미끄덕거리고 땅은 질척거린다. 숲을 이루는 질료인 땅과 식물 그리고 공기는 7월의 폭우처럼 자신들의 존재를 꿈틀대며 보여준다. 최수진의 그림은 흔한 것들, 잊혀지거나 보잘것없는 존재들의 반란이다. 이 하찮은 기억의 조각 같은 존재들은 평범한 일상에서는 그 자취를 감추다가 의외의 순간 갑작스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최수진은 이런 소리 없는 반란을 특정한 상황으로 개념화하기보다 의미 바깥에 위치한 일상의 일부로 환원한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상황이 아닌 상태로 제시된다. <구름철망>을 보면 작가의 뒷모습으로 추측되는 한 소녀가 철망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소녀의 등 뒤로 슬그머니 두 개의 얼굴이 공기 중에 떠다니며 침묵의 말 풍선을 그린다. 소녀의 발을 유심히 살펴보자. 철망을 딛고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공중에 떠있는 상태처럼 보이는 자세는 모호하다. 회화의 세계에서 발은 언제나 현실과 꿈의 경계 사이에 위치한다. 회화사에서 보면 땅을 딛고 서있는 모습은 강인한 삶의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고 고흐는 그린 흙이 묻은 한 켤레 구두를 통해 삶의 고단함이 덕지덕지 붙은 존재를 유추하게 만들지만, 마티스는<생의 환희>에서 무희들과 뮤즈를 마치 무중력 상태의 대지와 공기 속에서 부유하는 모습으로 등장시키기도 했다. 이같이 발의 위치와 표현은 작가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한다. 중력이 사라진 공간은 무게의 존재도 지워버린다. 몽상의 세계에서 소녀는 수분을 머금은 기체가 되면서 가벼워진다. 그에게 숲은 기억이고 예술적 원천이 된다. 아주 어린 시절 어두운 숲을 도망가듯 통과해야 했던 기억은 초현실적인 해석이 덧붙여지면서 두려웠지만 환상적인 경험으로 각색된다. 어린 시절 숲에서의 경험들은 다양한 감정의 결을 그의 몸속에 각인시킨 듯하다. 체화된 기억은 몽상의 종자가 되어 이제 그림으로 새롭게 연출되는 중이다.
김채원의 소설 <봄의 환> 마지막 부분엔 이런 문장이 있다 : “그는 가만히 점점 더 가만히 그의 전부로 집중한다. 그의 몸도 자연과 함께 무엇인지 조금씩 아주 조금씩 터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그의 몸은 열리고 그리고 무엇인지가 조금씩 솟아나기 시작한다. 솟구쳐 오른다. 몸이 열리고 터지며 솟구친다. 그는 우주와 자신의 몸이 동일해짐을 어슴푸레 느낀다.” 자아를 찾는 중년의 여주인공의 내면을 묘사한 이 문장은 자기파괴와 번민 끝에 되찾은 생의 환희를 묘사하고 있다. 최수진의 회화에서도 위의 문장과 유사하게 환(幻)의 사유가 발견된다. 환이란 한자는 “헛보이다, 미혹, 현혹하다, 괴이하다, 허깨비나 환상”을 의미한다. 그가 제시하는 환의 개념은 도피를 위한 환상이나 현실의 환멸이 아닌 유년의 기억을 탐미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저리(imagery)에 가까워 보인다.
꿈꾸듯 흐릿하고 모호한 상태의 세계로 펼쳐진 각각의 작품들을작가는 하나의 소설을 짓는 과정이라 말한다. 몽상적 세계는 의인화 된 시적 풍경으로 나무와 소년이 눈을 마주하기도 하고 (나무와 소년) 숲을 잠자리 삼아 누워있는 불면증에 걸린 사람을 풍자적으로 재현(불안의 노래)하기도 한다. “불안의 노래”는 불가항력적인 불면증의 상태를 그리고 있다. 아무리 뒤척여도 현실과 몽상이 서로 충돌하고 어떤 이야기도 끝을 맺기 어려운 당황스러움을 최수진은 진공 상태로 해석한다.몽상의 시학은 현실의 부피와 무게를 중화시켜 모든 사물이 구름의 상태로 환할 수 있도록 부추긴다. 불면의 밤을 견디는 고통을 비유하는 사자성어 몽환포영(夢幻泡影 꿈 허깨비 거품 그림자)처럼 인생의 덧없음을 진리로 풀어내는 것은 지나친 비약만은 아닐 것이다. 하루와 영원은 결국 동의어니 말이다. 최수진에게 몽상은 일상의 일부다. 존재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의견은 다를 수 있겠지만, 예술가에게 몽상이란 삶 자체일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시인의 눈은 “ 우주에 대한 추억의 본질”을 전달하는 사람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그에 따르면, 예술가란 추억을 미학적으로 재구성하는 사람으로, 이 경우 몽상이 새로운 예술적 세계를 펼치는 시간을 허용해 준다. 작가의 몽상은 ‘위대한 농담가’를 자신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위대한 농담가>는 낭만주의 회화의 전형인 고독한 지식인의 모습을 닮았다. 여기 배 밑에 책을 내려놓고 드러누워 얼굴 주변에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초승달이 떠있는 것처럼 보이는 농담가와 그를 마치 폭포수처럼 표현된 거대한 천으로 감싸 들고 있는 남과 여가 있다. 여자가 차고 있는 목걸이는 태양처럼 빛나고 있고 남자의 머리와 얼굴은 산화가 되듯 무너지고 있다. 최수진은 이 그림을 진실을 부추기는 현실의 이율배반적인 태도가 만드는 비극적 상황을 희극으로 풍자하는 농담가를 초대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한다. 그럴듯한 이야기다. 반면 내게 이 작업은 별들의 노래처럼 보인다. 농담가를 감싸고 있는 천은 우주를 비유하는 듯이 여인의 오른손 밑에는 별똥들이 몇 방울 떨어지고 있다. 어쩌면 폭포 같은 검은 천은 부조리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블랙홀일지도 모를 일이다.
구름, 말 풍선, 안개와 같은 낱말은 최수진의 작업에서 자주 발견되는 일련의 키워드들이다. 특히 문학은 그의 작품세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나무를 껴안은 남자>는 오규원의 시 “소년과 나무”으로부터 받은 감응의 결과다. 나뭇가지가 소년의 볼을 쓰다듬고 소년은 나무를 껴안은 채로 마주보고 있는 장면은 이번 전시작들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형상과 비형상, 인간과 자연, 사물과 비존재는 기체상태의 회화적 세계를 보여주면서 평화, 공존, 불면, 불안, 막연함, 희망, 유희와 같이 매일 겪어야 하는 작가의 심리적 변이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궁극적으로 삶을 그리고자 하는 그에게 기체상태의 질감이란, 생명의 근원인 ‘숨’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13살까지 정상적으로 호흡을 할 수 없었던 경험 때문인지 작품 곳곳에 부풀어진 공기와 무거운 공기가 동시에 묻어난다. 마치 장마철의 답답함처럼 말이다. 최근 읽기 시작한 헤르타 뮐러의 문학은 최수진의 감수성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는데, 특히 시적 언어가 전하는 공감각적 풍요로움은 이 젊은 화가에게 회화란 곧 시라는 사실을 강하게 전달하는 듯하다. 뮐러의 문학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인간 본성의 한계와 자의식의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이 절박함 속에서도 그의 문장은 보석처럼 빛나는 시어들로 채워져 우리가 대면하기 불편한 진실을 마주보도록 도와준다. 예술의 힘은 여기에서 진정 빛을 발한다.